서해의 ‘핫 플레이스’
충남 태안 바다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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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휴양지에서나 볼 수 있는 '산호 바다'는 아니지만 맑은 날 밀물 때에 맞춰 가면 새하얀 굴 껍데기가 소복하게 쌓인 해변과 에메랄드빛 바다를 볼 수 있는 충남 태안 '민어도' 해변, 펄이 섞여 탁한 색감의 서해에 대한 편견을 무너뜨리기에 충분하다. 다만 주변으로 이와 다른 '반전 풍경'이 펼쳐진다. / 김용재 영상미디어 기자 |
해변을 거닐 때마다 하얀 굴 껍데기 바닷가, 금빛 모래언덕, 잿빛 갯벌이 펼쳐진다. 해안선 길이만 무려 559.3㎞에 이르는 충남 태안은 서해에서도 표정이 가장 풍부한 배우같다. 물때, 노을빛에 따라 해변은 갯벌 체험 놀이터가 되어주고, ‘시크릿 캠핑 명소’로 옷을 갈아입기도 한다.
최근엔 태안의 대표 해변뿐 아니라 마을 단위 아담한 해변들이 속속 알려지면서 블로그, 인스타그램 등 소셜미디어(SNS)를 ‘강타’하고 있다. “서해의 몰디브” “태안 속 제주”라는 극찬을 받는 ‘민어도’부터 캠핑 고수들 사이에서 감성 캠핑 성지로 떠오른 ‘병술만’까지, ‘바다의 날’(5월 31일)을 맞아 태안의 뜨는 해변들을 찾아가 팩트를 체크했다.
◇에메랄드빛 바다 ‘민어도’ 가 보니
호기심의 시작은 ‘필터(사진이나 동영상에 입히는 효과)를 적용한 영상 아니냐?’는 댓글이 달린 인스타그램 속 민어도. 원본마저 의심하게 한 에메랄드빛 바다의 영상은 게시 후 며칠 만에 4만뷰를 기록하며 화제를 모았다. 민어도가 주목받기 시작한 건 작년 이맘때다. 올봄부터 ‘서해의 몰디브’ ‘이국적 해변’ ‘태안 속 제주’라고 더욱 소문나면서 관심이 폭발했다. 한편에선 ‘사진만 믿고 갔다간…’이라는 의미심장한 댓글도 보였다. 호기심을 해결하고 팩트 체크도 해볼 겸, 요즘 태안에서 최고로 ‘핫’하다는 민어도부터 찾아갔다.
태안반도 북단 원북면 방갈리의 민어도는 가는 길부터 미심쩍다. 바다를 만나기도 전에 거대한 ‘태안화력발전소’ 단지 등을 파고든다. 커다란 굴뚝을 머리에 인 투박한 콘크리트 건물 샛길을 빠져나와서야 마침내 ‘민어도 선착장’에 닿는다. 마주 보이는 선착장을 향해 고개를 갸우뚱했다가 고개를 돌리자 반전 풍경이 펼쳐진다. 새하얀 굴 껍데기가 소복하게 깔린 해변 앞으로 에메랄드빛 눈부신 바다와 ‘영접’한다. 맑은 날 밀물 때만 볼 수 있다는 이 풍경은 펄이 섞여 탁한 색감의 서해에 대한 편견을 무너뜨리기에 충분하다. 한쪽으로는 해안 절벽까지 더해져 이국적인 정취가 물씬. 사진, 영상 하나에 반해 찾은 이들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저마다 ‘포토 타임’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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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색감과 대비를 이루며 '민어도' 해변을 이국적으로 보이게 하는 하얀 굴 껍데기가 지천으로 깔려있다. / 김용재 영상미디어 기자 |
민어가 많이 잡혀 민어도라 불렸다던 민어도는 ‘이원방조제’가 생기면서 육지화됐다. 해변이 아담하고 굴 껍데기, 자갈이 많아 해수욕이 어려운 대신 해안 절벽이 내어준 그늘에 앉아 바다 보며 ‘물멍’ 하기 좋다. 하지만 SNS 속 민어도 풍경에 반해 찾는다면 다소 당황할 수도 있다. 해변 한쪽은 ‘화력발전소 뷰’다. 주말이면 선착장 갓길엔 주차 행렬이 이어진다. 해수욕장이 아니기에 주변엔 화장실이나 매점 등 편의 시설이나 의자 하나 없다. 썰물 때 풍경은 기대와 다를 수 있다.
인근의 유일한 숙박 시설인 ‘민어도 펜션’의 주인 홍석환씨는 “원래 바다낚시와 해루질(맨손으로 어패류를 잡는 일) 체험객, 반려동물 동반 가족들이 조용히 찾던 곳이었으나 작년부터 잠시 들렀다가 가는 방문객만 늘어나는 상황”이라며 “이곳만의 소박한 풍경이 지켜질 수 있게 아니 다녀간 듯 다녀가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민어도 선착장을 빠져나와 가까운 해수욕장을 찾는다면 남쪽 ‘학암포해수욕장’으로, 북쪽 태안의 최북단 해변인 ‘꾸지나무골해수욕장’으로 갈 일이다. 차로는 각각 15분 거리에 있다.
◇‘사하라 사막’ 지나 ‘한국의 우유니’ 해변?
민어도에서 차로 20여 분 남쪽으로 달리면 젊은 층 사이에서 ‘낙타는 없지만 느낌만큼은 진짜 사막’이라 불리는 ‘신두리 해안사구’가 나타난다. 해외여행 길이 막혀 있던 코로나 시기에 사막 여행 복장을 하고 재미난 사진을 건질 수 있다고 소문나 젊은 층 사이에서 사막 여행 사진 찍기 붐이 일었던 곳. 지금은 장년·노년 탐방객까지 사막 여행 사진 찍기 열풍에 가세한 분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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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 여행 연출 사진'으로 유명한 천연기념물 '신두리 해안사구'의 포토존에서 탐방객들이 사진 촬영을 하고 있다. / 김용재 영상미디어 기자 |
지난 25일 신두리 해안사구를 찾은 한 60대 여성은 “사막 여행은 못 가봤으니 여기서 기념사진이라도 한 장 찍어보자”며 남편 옷소매를 잡아당겼다. 길이 3.4㎞, 폭 0.5~1.3㎞로 국내에서 가장 크고 넓은 모래언덕인 신두리 해안사구는 1만5000여 년의 시간 동안 형성된 것이다. 꽃과 풀이 어우러져 천국보다 아름다운 풍경을 자랑한다.
전국 최대의 해당화 군락지를 만나려면 지금이 제철. 붉은 보랏빛이 감도는 해당화가 곳곳에서 발길을 잡는다. 시기에 따라 통보리사초, 모래지치, 갯완두, 갯메꽃, 갯방풍 등 희귀 식물도 만날 수 있다. 탐방로를 따라가다 보면 문득 ‘해당화가 곱게 핀 바닷가에서 나 혼자 걷노라면~’으로 시작하는 동요가 떠오른다. 탐방로에 출몰하는 ‘개미귀신’ ‘조롱박먼지벌레’도 볼거리다. 전망대인 ‘순비기 언덕’에선 하얀 사구와 푸른 바다를 한눈에 담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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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색을 닮은 바다 곁에서 오래도록 시간을 축적해온 신두리 해안사구에 해당화를 비롯해 야생화 융단이 깔렸다. / 김용재 영상미디어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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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두리 해안사구'는 전국 최대 해당화 군락지이기도 하다. 제철 맞은 해당화가 탐방객들을 마중 나온다. / 김용재 영상미디어 기자 |
람사르습지 중 작은 습지에 속하는 ‘두웅습지’가 신두리 해안사구에서 1.5㎞ 거리에 있어 간 김에 들러볼 만하다. 신두리 해안사구에서 나와 이정표를 따라가면 만날 수 있다. 신두리 해안사구에 의해 만들어진 두웅습지에선 운이 좋다면 멸종 위기 야생 생물 2급인 금개구리도 목격할 수 있다고. 오는 7일엔 해안 사구 걷기 대회 등 ‘대한민국 사구 축제’가 더해진다.
안면도수목원을 지나 태안반도의 남쪽 고남면에 있는 ‘운여해변’은 남미 볼리비아의 ‘우유니 소금 사막’이 알려지면서 덩달아 ‘한국의 우유니’로 떠올랐다. 우유니 소금 사막은 비가 와 웅덩이에 물이 고이면 반영(反影)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사진 촬영 명소다. 소금 사막은 아니지만, 운여해변 역시 밀물이 바닷가 솔숲 안쪽까지 들어오면 마치 데칼코마니 작품처럼 바닷물에 반영된 솔숲과 하늘 풍경을 눈에 담을 수 있다. 은하수까지 더해지는 시기엔 전국 사진 동호인들이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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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빛 노을로 물들어가는 '운여해변'. 갯벌 너머 해루질에 나선 이들마저 그림이 된다. / 김용재 영상미디어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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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여해변을 마주하고 남쪽 방향 고개를 돌리면 호주 그레이트 오션로드의 '12사도상'이 연상되는 해안과 섬 풍경이 펼쳐진다. / 김용재 영상미디어 기자 |
이곳 역시 물때, 날씨, 타이밍 삼박자를 맞추지 못하면 솔숲만 덩그러니 있을 뿐 비경은 보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발걸음 돌리기 전에 해변으로 향할 일이다. 썰물 때 드넓은 모래톱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하면 또 다른 반영 포인트가 생긴다. 이에 더해 서해의 일몰 간판스타인 ‘꽃지해수욕장’을 능가하는 황금빛 일몰이 스며들면 운여해변은 ‘골드 로드’로 변신한다. 우유니 못지않은 “운여니?” 해변이란다.
◇바닷가에서 ‘오션 뷰 캠핑’
태안해안국립공원에 속한 20여 개 해변 중 바다 캠핑장은 많지만, 운여해변에서 차로 10여 분 거리에 있는 ‘병술만어촌체험마을’은 서해를 전세 낸 듯 캠핑을 즐길 수 있어 자리 경쟁이 치열하다. 고려 시대 원나라에 대항한 삼별초가 수 개월 동안 주둔하며 훈련한 군사 요충지 병술만은 사극의 배경으로 자주 등장할 정도로 때 묻지 않은 자연미가 느껴진다.
해변과 ‘초근접’해 있어 밀물 땐 바닷가에 앉아 있는 듯 파도 소리가 가까이 들리고 노을이 더해지면 최고 전망을 자랑하는 오션 뷰 숙소로 변신한다. 캠핑장은 예약 후 도착 순서대로 사이트(자리)를 배정받는데 탁 트인 전망의 사이트를 맡으려면 “새벽 별 보며 대기해야 한다”고 소문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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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와 갯벌이 이보다 더 가까울 순 없는 '병술만어촌체험마을'의 캠핑장. '오션 뷰' 객실(자리)에 오후의 해가 서서히 스며들고 있다. 소나무 아래 '솔향 테라피'는 덤이다. / 김용재 영상미디어 기자 |
갯벌 체험은 선택 사항이다. 병술만어촌체험마을의 지백현 어촌계장은 “병술만 갯벌에선 바지락과 맛조개를 캘 수 있다. 요즘처럼 갯벌 체험하기 좋은 계절엔 연인, 가족 단위 캠핑객들이 즐겨 찾는다”고 했다. 자갈과 펄이 고루 섞여 있는 ‘자갈 갯벌’이어서 펄에 발이 푹푹 빠지지 않아 어린아이들도 갯벌 체험하기 수월하다. 체험료는 대인 1만원, 소인 8000원이며 1인당 2㎏을 채취해 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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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는 지금부터 한 여름의 뙤약볕이 내리쬐기 전까지 갯벌 체험 성수기다. '병술만어촌체험마을'뿐 아니라 몽산포해변 등 서해의 대표 해변에선 자유롭게 갯벌체험을 할 수 있다. 사진은 몽산포해변에서 갯벌체험을 하는 가족들. / 김용재 영상미디어 기자 |
◇내비게이션에도 없는 해변
‘서해의 몰디브’ ‘한국의 우유니’라 애칭이 붙은 핫플이 아니어도 우리나라 서해, 태안에만 있는 아름다운 해변 길도 있다. 태안해안국립공원의 ‘태안 해변길’이다. 2007년 태안 앞바다에서 발생한 유류 유출 사고로 침체한 지역 경제를 활성화하고 사계절 이용 가능한 탐방 문화를 만들기 위해 조성됐다. 총 22㎞로 신두리 해안사구가 있는 신두리해변에서 시작해 조선 시대 성곽인 ‘소근진성’, 소박하고 정겨운 어촌 ‘의항항’(현 개목항), 국제수목학회에서 세계의 아름다운 수목원으로 인증된 ‘천리포수목원’(입장료 일반 4~5월 1만5000원, 1만2000원)을 거쳐 태안 대표 해변인 만리포해변에 이른다. 특히 아름다운 해안과 마을 길, 샛길, 유류 유출 사고로 만들어진 방제도 등을 연결한 태안 해변길 중 2코스인 ‘소원길’은 사고 때 가장 피해가 컸던 소원면 구간을 엮었다. 당시 자원봉사자 123만명의 손길로 재난을 극복한 ‘태안의 기적’이 숨어있는 길이다.
만리포해변 부근에 자리한 ‘유류피해극복기념관’을 시작점으로 삼으면 소원길을 걷는 감동이 더해진다. 원상태로 회복되기까지 수십 년이 걸릴지도 모른다는 예상을 뒤엎고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자원봉사자들의 손길로 2008년에 재개장한 만리포해수욕장 이야기와 당시 봉사 현장을 사진, 영상 등으로 살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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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태안 기름 유출 사고 후 극복 과정을 기록한 자료들을 살펴볼 수 있는 '유류피해극복기념관'. 123만 자원봉사자들이 참여해 다시 찾은 태안 바다에 대한 소중한 기록은 2022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도 등재됐다. / 태안군 |
편도 20㎞가 넘는 코스가 부담된다면 소원길의 숨은 트레킹 코스인 ‘태배길’을 걸어볼 만하다. 6.3㎞ 약 3시간 정도 소요되는 해안형 트레킹 길로 유류 유출 사고 당시 자원봉사자들이 방제 작업을 위해 오가던 코스와 겹친다. 태배전망대’에서 시작해 ‘방제로’ ‘의항항’ ‘신너루해수욕장’을 두루 거치다 보면 내비게이션에도 안 나온다는 시크릿 해변과 다시 만난다. 간절한 소원이 쌓여 역경을 이겨낸 ‘기적의 바다’다.
[태안=박근희 여행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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