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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속도로 달려가는 대법관 증원…판사들은 부글부글 [세상&]

헤럴드경제 박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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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관 30명 증원법 법사위소위 통과
초고속 통과에 현직 법관들 우려 한목소리
독일 대법관 350명 ‘비교 부적절’ 지적
사건 적체 심각…전원합의 기능 약해 비판도
지난 1일 대법원에서 열린 이 후보의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 상고심 선고에 참석한 조희대 대법원장 [연합]

지난 1일 대법원에서 열린 이 후보의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 상고심 선고에 참석한 조희대 대법원장 [연합]



[헤럴드경제=박지영 기자] 국회가 이재명 대통령이 취임한 첫날부터 대법관 증원법 처리에 속도를 내면서 사법부 내부가 부글부글 끓고 있다. 사법부 체계를 뒤흔드는 법안을 숙의 없이 ‘졸속’ 처리하고 있다는 비판이다. 사법부 바깥에서는 상고심 절차 개선 필요성이 꾸준히 지적된 만큼 사법부도 해결 의지를 보여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는 지난 4일 법안심사소위원회를 열어 법원조직법 개정안을 의결했다. 시행을 1년 유예하되 현재 14명인 대법관 수를 4년 동안 매년 4명씩 늘려 30명으로 증원하는 내용이다. 법사위 전체회의→본회의 의결→대통령 재가·공포를 거치면 시행된다.

“사법 체계 망가진다” 급변에 우려 한목소리
5일 한 고등법원 부장판사는 헤럴드경제와 통화에서 “대법관 30명 증원은 사법 체계를 망치는 일”이라며 “독일 시스템으로 가겠다는 것인데 현재 한국 법원 시스템과 맞지 않다”고 비판했다. 이어 “대법관이 많아지면 소부(小部)가 ‘전문화’ 될 수 있다는 의견도 있지만 현재 한국 법관들은 형사·민사·행정·가사 등 모든 사건을 담당하는 ‘제네럴리스트’다. 독일처럼 전문법관을 양성하는 시스템이 아니다”고 지적했다.

대법관 대폭 증원을 주장하는 측에서는 독일을 사례로 든다. 독일의 대법관 수는 350여명 수준이다. 세부적으로 보면 한국과는 차이가 크다. 먼저 독일의 1심·2심 재판은 각 주의 법원이, 상고심은 연방법원이 맡는다. 연방법원은 ▷연방일반법원(민사·형사 등) ▷연방행정법원 ▷연방재정법원 ▷연방노동법원 ▷연방사회법원 등 5개 분야로 구분된다. 별도로 연방헌법재판소가 존재한다.

판사들은 주(州)법원 또는 연방법원 소속으로 임관해 종신으로 재직, 시작부터 끝까지 한곳에서 전문성을 쌓는 구조다. 각 연방법원에 소속된 법관들도 ‘부장판사’와 ‘배석판사’로 나뉜다. 민형사 사건을 담당하는 연방일반법원의 부장판사가 19명으로 가장 많고, 나머지 연방법원의 부장판사는 10명 내외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의 대법관과 유사한 연방법원 부장판사는 60명 안팎에 그치는 셈이다.


“재판 지연, 증원으로 해결 불가능” 불만
또 다른 현직 부장판사는 “사법 시스템 전체를 바꾸는 일을 공청회, 법관 의견 수렴 한번 없이 진행하고 있다. 일반 국민이 보기에는 ‘보복’ 아니겠느냐”라며 “사건 처리가 느린 것은 대법관이 적어서가 아니라 상고 사건이 많고 대법관이 모든 상고 사건을 들여다보기 때문이다. 상고허가제, 상고법원, 고등법원 상고부 등 다른 대안은 제쳐두고 급하게 처리할 일이 아니다”라고 했다.

상고심 적체는 대법원의 오랜 숙제였다. 1990년 상고허가제가 폐지되고 30년 동안 사건 숫자가 폭발적으로 늘었다. 매년 대법원에 올라오는 사건 수는 4만~5만 건에 달하고, 각 대법관이 주심으로 맡는 사건만 4000~5000건 수준이다. 대법원은 2019년 상고제도개선특별위원회를 만들어 연구를 진행했고 2023년 1월 입법 의견을 내기도 했다. 상고허가제 실시를 전제로 대법관을 4명 증원하자는 내용이었다.


대법관 증원이 1심·2심의 부실화를 초래할 것이라는 우려도 크다. 현재 대법원은 대법원장을 포함한 14명의 대법관과 100여명의 대법원 재판연구관으로 구성돼 있다. 대법원 재판연구관은 15년차 이상 베테랑 판사들이 맡는다. 대법관은 재판연구관이 작성한 검토보고서를 바탕으로 사건을 종결시킬지, 추가로 심리할지 결정한다. ▷일반 재판 연구관 ▷전속조·공동조 부장연구관 ▷수석·선임재판연구관 등으로 나뉜다.

대법원 재판연구관 출신 법조인은 “대법관 숫자에 따라 재판연구관 숫자를 늘리면 ‘아랫돌 빼서 윗돌 괴기’다. 베테랑 판사들이 대법원으로 몰리니 일반 국민이 받는 1심·2심이 부실해질 수 있다”며 “재판연구관 숫자를 그대로 두면 대법원 사건의 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장기적인 법관 증원과 양성없이 해결 불가능한 ‘딜레마’”라고 지적했다. 이어 “대법원은 법 해석에 통일성을 부여하는 역할도 한다. 대법관이 30명 되면 ‘합의’ 기능이 약화할 수밖에 없다”고도 지적했다.

사법부 바깥은 ‘증원’ 찬성

하지만 법원 바깥에서는 대법관 증원에 찬성하는 분위기다. 대한변호사협회(협회장 김정욱)는 지난달 23일 상고심 지연 방지 및 충실한 재판을 위해 대법관 증원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변호사업계는 ‘국민의 재판 받을 권리’를 강조하며 대법관 증원, 상고허가제 반대 입장을 꾸준히 견지해 왔다.

학계도 마찬가지다. 재판 지연 해소, 대법관 구성 다양화 등을 위해서는 증원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법원이 전원합의체를 강조하지만, 실질적인 운영을 보면 대법관 4명으로 구성된 소부를 중심으로 이뤄진다는 지적이다.

김진한 클라스한결 변호사(전 인하대 로스쿨 교수)는 “현재 대법원의 심리 시스템은 국민들이 기대하는 재판 시스템이라 볼 수 없다. 사실상 소부에서 대부분의 판례를 만들고, 소부에서도 주심 재판관이 주도하는 ‘1인 재판’”이라며 “전원합의체에서 나오는 결론은 0.1%도 되지 않는다. 대법원이 최고법원으로서 전원합의체 중심의 상고심을 운영해 왔는지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실제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선고하는 사건은 매년 10~20건 수준이다.

그러면서 “대법원은 ‘상고허가제’ 중심으로 상고심 제도 개선을 논의했지만 대법관 증원에 대한 요구도 높다. 대법관 증원에 따른 실질적인 운영 방안을 독일 등 해외 사례에서 참고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한편 조희대 대법원장은 이날 출근길에 기자들과 만나 “대법원의 본래 기능과 국민을 위한 바람직한 개편 방향이 무엇인지 공론의 장이 마련되길 희망한다. 국회에 설명하고 협조하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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