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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또는 그 이후 암스테르담의 자택 거실 책상 앞에 앉은 요 반 고흐 봉어르. 책상 뒤편 벽에 그가 구매한 화가 앙리 판탱라투르의 그림 ‘꽃’을 중심으로 고흐의 작품 ‘은선초 꽃병’(위)과 ‘황혼 풍경’(왼쪽)이 걸려 있다. 아트북스 제공 |
빈센트 반 고흐(1853~1890)는 오늘날 세계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화가로 꼽힌다. 그가 남긴 그림은 물론 그의 삶과 예술 세계를 담은 책과 노래, 영화 등도 덩달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그렇지만 그의 생전에 팔린 작품은 단 한 점뿐이었고, 그가 죽고서 불과 6개월 뒤에는 헌신적인 후원자였던 동생 테오 역시 질병으로 숨을 거두었다. 그렇다면 자칫 망각의 늪에 빠져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릴 뻔했던 빈센트의 예술혼을 되살려 낸 이는 과연 누구였을까. ‘빈센트를 위해’는 그 숨은 주역의 삶을 조명한 평전이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빈센트반고흐미술관 수석 연구원인 한스 라위턴이 쓴 이 책은 테오의 부인인 요 반 고흐 봉어르(1862~1925)의 존재에 주목한다. 고흐 형제의 잇따른 죽음 뒤 빈센트 작품의 관리자가 된 그가 아주버니의 작품들을 알리고 그에 대한 미술계의 평가를 구축하는 일에 얼마나 열정적으로 매달렸는지, 몰이해와 편견의 벽을 뚫고 고흐의 예술혼을 확산시키기 위해 그가 구체적으로 어떤 노력을 펼쳤는지가 번역판 기준 500쪽 남짓 되는 두툼한 분량에 상세하게 담겼다.
암스테르담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요하나(‘요’의 원래 이름) 봉어르는 수준급의 피아노 연주 실력과 문학적 소양 그리고 빼어난 어학 능력을 지녔다. 영국 유학을 다녀와 교사로 일하는 한편 친구의 오빠인 의대생과 길지 않은 연애 끝에 헤어진 요는 파리의 미술상 테오의 청혼을 받아들여 1888년 말 파리로 향한다. 두 사람은 1889년 4월에 결혼식을 올렸는데, 그사이인 1888년 12월23일 남프랑스 아를에 있던 고흐는 자신의 귀를 자르고 병원에 입원한 데 이어 1889년 2월에 두번째 정신발작을 일으켜 다시 병원 신세를 지기에 이른다.
1890년 1월31일 요와 테오의 첫아이인 빈센트 빌럼이 태어났다. 일시적으로 건강을 되찾은 고흐는 자신과 이름이 같은 조카를 위해 사랑스러운 그림 ‘아몬드꽃’을 그려 선물로 보낸다. 생레미요양원에서 나온 그는 그해 5월 파리에 와서 사흘간 테오의 가족과 같이 지낸 다음 파리 북쪽 마을 오베르쉬르우아즈로 옮겨갔지만, 7월에 권총 자살을 시도한 끝에 숨을 거둔다. 형의 죽음을 수습하고 미술상으로서 업무를 이어 가느라 분주하던 테오 역시 그해 10월 초에 급격히 건강이 나빠져 병원에 입원했고 결국 이듬해 1월 허무하게 숨을 거두었다. 남편이 병원에 있는 동안 브뤼셀에서 고흐의 추모전이 열리는데, 요는 남편을 대신해 그의 드로잉 작품을 챙겨 보낸다. “이것이 앞으로 그녀가 평생 맡아 수행하게 될 반 고흐 예술 유산의 홍보와 전파라는 명예로운 과업의 출발점이었다.”
사실 요에게는 애초에 미술적 소양이 충분하지 않았다. 결혼 뒤 그는 남편의 안내로 미술관에 가서 작품을 감상하고 설명을 들었으며 남편 사후에는 독자적으로 미술계의 다양한 이들과 교류하며 인맥을 쌓았다. 빈센트와 관련한 전시회가 열리면 리뷰를 챙겨보고 기사와 카탈로그를 수집해 그의 작품에 대한 평가를 꼼꼼하게 살폈다. 1891년 11월의 일기에서 요는 이렇게 쓴다. “빈센트의 작품을 가능한 한 세상에 많이 알리고 제대로 평가받게 하는 일, 테오와 빈센트가 수집한 모든 보물을 우리 아이를 위해 온전히 보존하는 일, 그것 역시 내가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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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를 위해 l 한스 라위턴 지음, 박찬원 옮김, 아트북스, 4만2000원 |
생전에 제대로 이해받지 못하던 고흐의 작품 세계는 사후에 조금씩 평가받기 시작했다. 프랑스와 네덜란드 등지의 잡지에 그가 동생에게 보낸 편지가 그림과 함께 실리며 그의 삶과 작품에 대한 관심을 끌어올렸다. 유럽 여러 나라에서 작품 출품 요청이 이어졌고, 요는 판매용과 소장용 그림을 섞어 보내는 “영리한 전략”으로 미술품 수집가와 미술 애호 대중을 함께 공략했다. 1905년 암스테르담 시립미술관에서 열린 반 고흐 전시회는 고흐의 사후 명성 확립의 한 획을 그었다. 회화와 드로잉을 합해 480여 점이 나온 이 전시가 끝난 뒤 요는 국립미술관에 고흐의 작품 두 점을 기증했고, 그 사실이 신문에 기사로 실리면서 고흐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요가 의도한 바였다. 요는 또한 고흐의 작품을 복제품으로 만들어 파는 사업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는데, 이 역시 고흐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빈센트와 테오는 모국어인 네덜란드어뿐만 아니라 프랑스어로도 편지를 주고받았다. 영어는 물론 프랑스어와 독일어에도 능통했던 요는 형제의 편지를 정리하고 직접 번역해서 출간하는 일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빈센트의 편지는 그가 가난과 정신질환에 시달린 불행한 화가가 아니라 독자적이며 현대적인 미학을 추구한 예술가였다는 사실을 알게 했다. 요는 서간집의 독일어판이나 네덜란드어판, 영어판 등이 출간되는 시점에 맞추어 해당 국가에서 전시를 마련함으로써 시너지 효과를 거두도록 했다. 말년에 파킨슨병에 시달리던 요는 프랑스의 미술평론가 귀스타브 코키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그 오랜 세월 빈센트와 그의 작품에 대한 대중의 무관심, 심지어 적대감과 맞선 후, 제 생애 끝에 이르러 마침내 승전했으니 너무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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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반 고흐 봉어르의 두번째 남편인 화가 요한 코헌 호스할크가 그린 요의 초상화. 1905년 암스테르담 시립미술관에서 대규모로 마련된 고흐 전시회를 성공적으로 마친 뒤 자신감에 찬 표정이 인상적이다. 아트북스 제공 |
요가 숨을 거둔 뒤 유산을 물려받은 아들 빈센트는 1931년 암스테르담 시립미술관에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큰아버지의 작품 전부를 무기한 대여했고 1973년에는 시립미술관 옆에 ‘국립미술관 빈센트 반 고흐’가 개관한다. 지금의 반 고흐 미술관인 이곳에는 ‘아몬드꽃’과 여러 점의 자화상, 초기작인 ‘감자 먹는 사람들’, 말년의 대표작 ‘까마귀가 나는 밀밭’ ‘노란 집’ ‘해바라기’ 등이 보관돼 있다. 책은 고흐의 유산을 지키고 확산시키려는 노력과 함께 사회민주노동당 당원으로서 노동자 권익 향상과 여성 참정권 운동에 적극 참여한 요의 정치·사회 활동에도 상당한 비중을 할애한다. 책의 마지막 문장은 오늘날의 고흐 열풍에서 요가 맡은 역할을 이렇게 요약한다. “반 고흐가 문화사에서 영원히 이어질 명예를 얻은 것은 요의 끊임없는 노력과 헌신적인 기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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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가 동생 테오의 아들이자 자신과 이름이 같은 조카의 탄생을 축하하며 선물로 그려 준 ‘아몬드꽃’(1890). 아트북스 제공 |
최재봉 선임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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