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의 고수가 동네 이장이 되어 현충일 국기 게양, 장마철 축대 관리, 혹서기 농사일 금지 등을 권유하고 다닌다. 누가 이 사람을 4만명을 가르친 춤 선생이라 할 것인가. 세계 민족춤 연구가 주디 반 자일이 춤을 배워가고, 현대무용의 거장 피나 바우슈가 두 손을 붙잡은 춤꾼인 줄 누가 알겠는가.
![]() |
이윤석은 국가무형유산 고성오광대놀이의 말뚝이춤 인간문화재다. 조용배와 허종복을 잇는 명무로 탈을 쓰고 채찍을 들면 ‘말뚝이춤’이요, 탈을 벗고 활개를 펼치면 ‘덧배기춤’이다. 박상윤 제공 |
“좋게 보면 꽃 아닌 게 없고, 나쁘게 보면 잡초 아닌 게 없다.” 들여다보면 오밀조밀 예쁜 꽃이지만, 밭에선 작물의 양분을 뺏는 잡초일 뿐이다. 고구마밭, 참깨밭, 수박밭이 꽃밭이 될까 봐 발본색원한다. 그러나 명색이 명줄이 질기다고 잡초 아닌가. 바랭이, 명아주, 쇠비름, 깨풀, 방동사니가 틈만 나면 비집고 올라온다. 뽑고 뽑다가 흙 속으로 딸려 들어갈 정도다.
경남 고성군 마암면 도전리 명송마을 이장 이윤석(1949년생). 장마가 잠시 멈추니 앞산 밭에 올라 잡초를 뽑는다. 산 아래 들판의 벼들은 벌써 푸르다. 예전엔 ‘하지 전 3일, 후 3일’이 모내기 적기였는데, 요즘엔 보리를 심지 않아 모내기가 당겨졌다. 게다가 벼농사 기계화율 99%이니 이앙기가 다 알아서 한다. 보리 베고 모내기하던 이모작 시절, 눈코 뜰 새가 없어 “노루가 애를 물어가도 돌아볼 여가가 없다” 했다. 이제는 그저 옛말이 되었다.
밭두렁 옆 선영에 다섯 부모가 누워 있다. 1949년 겨울, 그가 울음을 터트리자 이 다섯 부모가 함박웃음을 터트렸다. 큰아버지는 둘째 부인까지 얻어 아들을 보려 했으나 소식 없어, 동생의 아들을 양자들이기로 한 것이다. 한 지붕 아래서 아버지 둘, 어머니 셋, 다섯 부모의 등에서 등으로 업혀 다니느라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부모들은 너무 귀해 감히 공부도 권하지 않았고, 학교보다 장가보내고 싶었다. 뒤늦게 뜻을 받들어 스무살에 조혼했는데, 지금은 벌써 ‘증조 할배’가 될까 걱정이다. 몇년 전 평장한 선영은 잡초 하나 없는 잔디 육묘장 같다. 그래도 풀이 보이는지 허리를 굽혀 뽑고 간다.
산 아래 논에는 모눈종이 위에 모를 꽂은 듯, 오차 없이 반듯하다. 아직 빈 논이 있어 물었더니, 가루쌀을 심을 거란다. 쌀 소비량은 턱없이 줄고 밀 수입량은 99.5%, 쌀 소비 진작을 위해 농촌진흥청에서 가루쌀 품종 ‘바로미2’를 개발했다. 밀가루처럼 가루 내기 쉽고 가공 비용도 저렴하다. 단 일찍 심으면 이삭에서 싹이 트는 ‘수발아’가 생겨 모심기를 늦춘단다. 이미 벌써 쌀농사의 풍년이 국가의 짐이 된 때문이다. 유선형으로 날렵하면서도 토실토실한 쌀, 경상도 농사꾼이 “쌀”을 “살”로 발음하는 것은 바로 ‘쌀’이 ‘살’이고 ‘삶’임을 말함이었다. 그래서 “밥풀 하나 떨어뜨리면 벼락 맞는다” 했다. 그러나 이 또한 옛말이 된 것이다.
집 앞에 있는 고추밭은 담배나방이 문제다. 나방이 꽃에 알을 낳아, 고추 속에서 자란 애벌레가 구멍을 뚫고 나온다. 이놈의 생태가 마치 할리우드 영화 ‘에일리언’의 원작인 것 같다. 이 께름칙한 놈이 애초에 접근 못 하게 ‘님 오일’을 희석해서 뿌린다. 1958년 동아프리카에 사막메뚜기떼가 덮쳤을 때 유일하게 살아남은 게 님나무였다. 이 일로 천연 해충기피제임을 알게 되어 유기농법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한다.
이쯤이면 완벽한 영화다. 칼을 버리고 무림을 떠난 고수가 농사꾼으로 숨어 사는 무협영화. 무림의 고수가 동네 이장이 되어 현충일 국기 게양, 장마철 축대 관리, 혹서기 농사일 금지 등을 권유하고 다닌다. 누가 이 사람을 4만명을 가르친 춤 선생이라 할 것인가. 세계 민족춤 연구가 주디 반 자일이 춤을 배워가고, 현대무용의 거장 피나 바우슈가 두 손을 붙잡은 춤꾼인 줄 누가 알겠는가. 춤 이력을 물었더니, “다섯 부모와 스무명의 오광대 스승을 장사 지냈다”고 한마디로 줄여 말한다.
![]() |
2004년 10월 현대무용의 거장 피나 바우슈가 한국을 소재로 한 신작 ‘러프 컷’(Rough Cut)을 위해 내한했다. 경남 통영 굿판에 초대되어 즉흥춤을 춘 이윤석이 정말 농사꾼인가 확인하며 웃는다. 박상윤 제공 |
실한 농사꾼의 춤은 징소리에서 태동한 듯하다. 그가 친모라고 생각한 양부의 둘째 부인 ‘갈래댁’은 강신무였다. 당시 정월이면 매일 굿이었고, 어머니가 울리는 묵직한 징소리가 예사롭지 않았다.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 마을에 농악패가 만들어졌다. 마을 상쇠 허판세(1920~1999)의 꽹과리 가락이 좋아 고성 인근을 돌며 지신밟기를 했다. 그 농악패의 끝자락에서 소고를 치며 춤을 추었다. 화전놀이에서 놀았고, 모심기, 김매기, 백중날 ‘호미씻기’에서 울렸다. 그렇게 일찌감치 장딴지에 신명이 차올라 있었다.
1975년 병역을 마치고 허판세의 권유로 고성오광대에 입회했다. 보존회에는 모두 여덟명의 인간문화재가 있었다. 악이면 악, 춤이면 춤으로 충천한 명인들이었다. 그러나 모두 개성이 뚜렷해 언제나 패가 나뉘고 다툼이 일었다. 총무인 이윤석의 의견으로 승패가 갈렸는데, 그의 의견은 언제나 묵묵부답이었다. 어린 날 다섯 부모가 다툴 때 쓴 침묵이 최선의 도구였다. 여덟 스승을 설득하려면, 식으면 묵이 되는 진득한 침묵이 필요했다.
1995년 ‘문둥광대’와 ‘승무’를 거쳐 ‘말뚝이’가 되었다. 말뚝이는 양반의 말고삐를 쥔 하인으로 양반의 급소를 쥐고 흔든다. 양반의 출입처에 동행하니 비리는 물론 불륜까지 다 꿰고 있는 거다. 위선적인 양반의 뒤를 탈탈 터는 것이 말뚝이로, 채찍을 들고 솟구쳐 양반을 내리치는 탈판의 주역이다. 그가 말뚝이 탈을 받아 들었을 때, 어느덧 여덟분의 스승들이 세상을 떠나고 없었다. “예술은 돌 크듯이 크는 것”이라 했던 스승들이었다.
보존회 회장이 된 이윤석은 전수회관 사무실에서 화투판을 벌였다. 심심풀이 판이 아니라 회원 모두가 돈독이 오른 판이었다. 춤판을 벌이려면 회의를 해야 하는데, 언제나 정족수 미달이다. 그러니 화투를 미끼로 농사일로 바쁜 회원들을 유인해야 했다. “못 먹어도 고!” 군용 모포에 화투패를 내리치며 머리를 맞대고 궁리했다.
1999년 6월 서울 예술의전당에 ‘춤의 고을, 고성사람들’을 올렸다. 탈을 벗고 추는 춤판이라고 언론이 대서특필했다. 언론에 뜨니 향우들이 극장을 메웠고, 국회의원, 군수, 지역 유지들도 올라왔다. 읍내에서 공연할 때 격려사만 하고 간 그들이, 오광대의 전막을 다 보았다. 제발 그러기를 간절히 바라고 기획한 공연이었다. 군수는 “앞으로 공무원 연찬회에 오광대 실습을 넣겠다”고 즉각 반응을 보였다. 회원들 간에 우스갯소리가 돌았다. “벗으면 뜬다!” 각처의 향우들이 손짓했고, 부산, 울산, 창원 등을 순회하며 공연했다.
![]() |
‘춤의 고을, 고성사람들’ 초연 포스터. 탈에 가린 채 타계한 명무들이 남긴 춤을 알리고자 탈을 벗었다. 고향을 떠난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어 부제를 ‘고향을 나누는 춤판’이라 했다. 이윤석이 꿈꾸어 온 춤 농사의 주제다. 박상윤 제공 |
‘춤의 고을 고성사람들’ 포스터는 춤꾼들이 연습을 마치고 모닥불 쬐는 장면이다. 탈에 가린 채 타계한 명무들이 남긴 춤을 알리고자 탈을 벗었다. 고향을 떠난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어 부제를 ‘고향을 나누는 춤판’이라 했다. 이윤석이 꿈꾸어 온 춤 농사의 주제였다. 지금껏 20년 넘게 국내외를 돌며 수많은 공연을 하였다. 그리고 ‘이윤석의 덧배기춤’으로 수많은 명무전에 초대되어 탈을 벗고 추었다. 이제 포스터에 등장한 춤꾼의 반이 타계했고, 자신도 보존회 회장을 물리고 마을 이장이 되었다.
장마엔 폭우가 퍼붓다가도 “쨍”하고 볕이 난다. 그러면 “땡!”하고 공이 울리면 튀어나가는 복서처럼 들판으로 나간다. 폭염에 휩쓸리면 누구라도 체온이 치솟아 쓰러진다. 훗날 한국 무용사에 “밭농사 기계화율이 현저히 낮아 뙤약볕에서 영남춤의 명무를 잃었다”고 쓸 수는 없다. 저 본능의 농사꾼을 들판에서 떼어 놓는 묘책은 춤판에 부르는 것이다. 그래서 공연을 준비하며 몸에 공을 들이게 하는 게 최선책이다. 나는 달력에 8월16일은 서울 남산국악당 ‘축제의 땅에서’, 9월4일은 부산국악원 ‘영남무악’이라고 별표를 쳐 놓고 간다.
사족을 붙이면, 이윤석 춤의 핵심은 말뚝이의 채찍질에서 나온 기울기이다. 가령 누구라도 오른손에 막대를 들고 휘둘러 보시라. 저도 모르게 막대의 반경을 피해 왼편으로 숙이게 된다. 이 기울기가 탈을 벗고 채찍을 놓으면서 더 정교해졌다. 이윤석의 춤은 수평에서 왼발을 축으로 45도 정도 기울어 멈춘다. 그리고 춤을 벗어나 버릴 듯한 아슬아슬한 상태로 360도 회전을 한다. 무풍지대의 풍향계처럼 정지했다가 남실바람에 비로소 돌면, 세상 어느 춤에도 없는 ‘기하학적 기울기’가 나온다.
![]() |
진옥섭 | 담양군문화재단 대표이사. 초등학교 4학년 때 이소룡의 ‘당산대형’을 보고 ‘무(武)’를 알았고, 탈춤과 명무전을 통해 ‘무(舞)’에 빠져들었다. 서울놀이마당 연출로 서울굿을 발굴하면서 ‘무(巫)’에 심취했고, 초야를 돌며 기생, 무당, 광대, 한량 등 숨은 명인을 찾았다. ‘남무, 춤추는 처용아비들’, ‘여무, 허공에 그린 세월’, ‘전무후무(全舞珝舞)’를 올리며 마침내 ‘무(無)’를 깨닫게 되었다. 이 사무친 이야기를 담은 ‘노름마치’를 출간했고, 무대와 마당을 오가며 판을 만들고 있다.
▶▶[한겨레 후원하기] 시민과 함께 민주주의를!
▶▶민주주의, 필사적으로 지키는 방법 [책 보러가기]
▶▶한겨레 뉴스레터 모아보기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